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마스 복음서 (문단 편집) == 특징 == * 토마스 복음서를 요약하자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기위해서, '''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살자'''"는 것이다. 또한 이러기 위해서 '하나(the one)'를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는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의 '허(虛)사상'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자. 토마스 복음서(토마스복음)에서 말하는 '하나'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일관되게 순수하게 살아라'는 뜻이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으니 생각을 유연하게 가지자'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토마스 복음서에서는 '''가식'''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다른 사람의 제대로된 삶마저 방해하는 가식적인 권력자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불(fire)로 상징되는 '''사회 변혁의 면모'''도 보여준다. [* 기존 성경(정경)에서는 '예수의 채찍'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반면, 불교의 경우에는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므로 가치를 나누는 기준을 없애고, 나누어진 좌우를 하나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된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이 핵심이며, 이를 통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토마스 복음서(토마스복음)의 가르침은 불교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토마스 복음서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강조하기 보다는, '가식적이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훨씬 더 강조하기 때문이다. * 토마스 복음서는 모두 114개 구절인데 단지 [[예수]]의 발언만 기록한 어록 형식으로, 예수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배경을 설명하지 않는다. 진짜로 예수의 발언 그 자체만 실려 있다. * 공관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어록중에는 어떠한 행적을 하던 중에 이런 말을 했는지에 따라 해석을 해야하는 부분이 있다. 토마스 복음서에도 비슷한 어록들이 나오는데, 그런 말이 나온 배경이 되는 행적과 관련한 서술이 없다. 예를들면 토마스 65장의 어록[* 포도원 주인에 관한 비유]은 공관복음서에는 성전을 정화하던 중에 말싸움을 하면서 나온 말씀이라고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공관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행적을 토대로 해석을 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욕심이 앞서는 타락한 유대인의 성전에 대한 어리석음을 말하지만, 토마스 복음서는 다른 행적중에 나온 말과 한데 묶어 부유한자가 범할 수 있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해석을 보인다. 의외로 토마스 복음서쪽이 더 후대에 보일 법한 보편성을 보인다는것. 이는 토마스 복음서가 여러 어록을 추출해서 공통된 가르침끼리 한데 묶는 식의 서술을 지양했다는 의미이고, 공관복음에 비해 원론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만드는 근거가 되게 한다. 차라리 [[예수]]의 어록을 강조하는 무리가 보편적이고 현실을 강조하는 가르침을 위해 복음이라는 이름 하에 재작성했다고 보는 것이 편하다. * 토마스 복음서에서는 기존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문제인 [[부활]], [[종말론]] 등의 주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의외로 저자는 예수가 남겼다고 서술한 어록들에 '절대성'을 부여하면서 그가 [[메시아]] 라는 관점을 서장부터 명시하고 있다. 다만 직접적인 언급이 없을 뿐이다. 결국 '예수는 어떻기에 [[메시아]]인가?' 라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토마스 복음서는 남들이 바라본 예수의 행적을 해석하는 것 보다는, 예수가 남긴 어록을 깨닫는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여긴다. 단, 후에 나온 정경 사본을 참고한 서술이 있는점을 들어 토마스 복음의 어록이 원본 어록이라는데 신학자들은 회의적으로 본다. 때문에 저자의 개인적인 입김이 어느정도까지 들어갔을지는 알 수 없다. * 정경과 비슷하게 서술한 [[예수]]의 어록이 곳곳에서 보이지만, 사용된 단어 한 두개가 달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부분이 보인다. 정경이 본래의 어록을 바꾼건지, 혹은 정경이 맞는데 저자가 본인이 생각한 [[예수]]에 맞춰서 서술을 바꾼건지는 현재로써는 확인할 길이 없다. * 기존 권위를 전복하라는 것은 [[프리드리히 니체|니체]]의 사상과 통하는 면이 있다. 만약 토마스복음의 예수가 사실이라면, 니체가 죽였던 것은 사랑과 믿음으로 대표되는 [[사도 파울로스|바울]]의 노예도덕[* 독수리가 토끼를 사냥하는 상황을 보자. 토끼는 자신을 죽이는 독수리를 악으로 보고 그것을 감내하는 자신의 마음을 선으로 볼 것이지만, 독수리는 토끼를 선과 악으로 보지 않고 단지 좋아하는 음식으로 볼 것이다. 여기서 니체는 선악을 구분하는 토끼의 마음을 노예도덕으로 보았고, 호불호로 구분하는 독수리의 마음을 주인도덕으로 보았다. 즉, 토끼와 같이 약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여겨서 이것을 사랑과 희생으로 '''긍정하고 합리화'''하며, 현세가 아닌 내세의 천국과 종말론에 '''의지'''하는 기독교는 노예도덕이라는 것.]을 죽였던 것이지, 자신의 삶으로 충만한 예수의 주인도덕은 죽인 것이 아닌 셈이다. * 플로티노스의 일자에서 쓰이는 용어인 'the one'과 토마스복음에서 강조하는 'the one'이라는 용어는, 언뜻 보기에 같아 보인다. 그렇기에 토마스복음을 영지주의라고 보는 신학자들은 이러한 'the one'이라는 용어가 플로티노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토마스복음을 자세히보면 그 용어의 의미와 쓰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일자에서 분출되어 나온 물질과 정신이 사람의 영혼을 구성한다고 보아서 그 연속적인 계층관계가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토마스복음에서는 계층적 연속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토마스복음은 현세 중심의 철학이어서 부활과 메시아와 종말론을 언급하지 않는데 비해, 플로티노스는 일자를 이데아와 신으로 보고 내세를 긍정하기에 부활과 메시아와 종말론을 믿는 영지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The one' 은 토마스복음과 플로티노스에서 동일하게 나오지만, 다른 개념으로 쓰였다고 말해야 한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 애초에 일자(the one) 개념은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흔한 사상이라서 시대를 건너서 겹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 심지어 이 일자(the one)라는 개념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도 존재했었던 개념이다. BC 5세기 [[파르메니데스]]의 일자(the one)에서 출발한 관념론은, 플라톤에 의해서 이데아(idea)로 발전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수렴되었다. 예수가 살았던 시기는 로마에 의해 지배당하던 시대였므로, 예수가 이러한 개념에 어느정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다. 물론 예수가 말하는 일자(the one)는,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이 말한 것과도 다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노스가 말한 것과도 다르다. * 토마스복음에서 예수가 말하는 일자(the one)란, '''겉과 속이 달라서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자가 아닌, 겉과 속이 하나로 합치된 자, 또는 자신의 진실된 삶을 방해하는 가식과 위선을 던져버리고 세상의 모든 권위를 부숴버린 자, 그래서 아이와 같이 순수한 그 자'''를 일자(the one)라고 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